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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라는 남자
L I K E/문 학 l

 

 

 

그는 흑백으로 이루어진 남자였다.

그녀는 색깔이었다. 그녀는 그가 가진 색깔의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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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오베가 세상을 흑백으로 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색깔이었다. 그녀는 오베가 볼 수 있는 색깔의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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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어."그가 속삭였다.

아내가 죽은 지 6개월이 지났다. 하지만 오베는 하루에 두 번, 라디에이터에 손을 얹어 온도를 확인하며 집 전체를 점검했다.

그녀가 온도를 몰래 올렸을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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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잃게 되면 정말 별난 것들이 그리워진다. 아주 사소한 것들이. 미소, 잘 때 돌아눕는 방식, 심지어는 방을 새로 칠하는 것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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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40년 된 사진이었다. 그들이 스페인에서 버스 여행을 다니던 시절이었다. 그녀는 햇볕에 타 가무잡잡했고, 빨간 원피스를 입고 있었으며, 무척 행복해 보였다. 오베는 그녀의 손을 잡고 옆에 서 있었다. 그는 사진을 바라보며 한 시간은 앉아 있었을 것이다. 그녀를 그리며 상상하는 것 중에서 가장 간절한 건, 정말로 다시 하고 싶은 건 그녀의 손을 잡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기 집게손가락을 접어 그의 손바닥 안쪽에 숨기는 버릇이 있었다. 그녀가 그럴 때면 세상 어떤 것도 불가능한 게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워할 수 있는 모든 것들 중에서, 그것이 가장 그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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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보다 두 배 더 날 사랑해줘야 해요."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오베는 두 번째로 ─또한 마지막으로─ 거짓말을 했다.

그는 그러겠다고 했다. 그가 지금껏 기녀를 사랑했던 것보다 더 그녀를 사랑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음에도.

 

 

 

 

 

짝사랑, 이남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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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내 이름을 불러 준

그 목소리를

나는 문득 사랑하였다


그 몸짓 하나에

들뜬 꿈속 더딘 밤을 새우고

 

그 미소만으로

환상의 미래를 떠돌다

 

그 향기가 내 곁을 스치며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나는 그만

햇살처럼 부서지고 말았다

 

 

 

이남일 <짝사랑>

사랑의 물리학, 김인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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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량의 크기는 부피와 비례하지 않는다


제비꽃같이 조그마한 그 계집애가

꽃잎같이 하늘거리는 그 계집애가

지구보다 더 큰 질량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순간, 나는

뉴턴의 사과처럼

사정없이 그녀에게로 굴러 떨어졌다

쿵 소리를 내며, 쿵쿵 소리를 내며

심장이

하늘에서 땅까지 아찔한 진자운동을 계속하였다

첫사랑이었다




김인욱 <사랑의 물리학>


펜은 심장의 지진계,김승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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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알아! 나는 문학을 포기했는데. 너랑 친해질 만큼은 문학을 알고. 버스 정류장까지 뛰어서 갔다. 문학을 알아! 담배를 빨다가 기침을 했다. 나는 문학을 알아! 


온도계를 좋아해서 물을 끓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물을 끓였다. 눈금이 새겨진 막대 속에 수은주는 부드럽게 솟아오르지. 맨 위에 쓰여 있는 눈금을 향해. 

수은주는 아름답다. 지루하지만. 불을 껐다. 온도계가 터지지 않게. 나는 온도계를 좋아하니까. 


연락이 끊어졌어. 내가 끊었나? 나는 네가 무척 안쓰러웠지. 너한테는 이별이 처음이라고. 그렇게 판단했어. 담배 피웠어. 슬펐니? 우리들의 마지막 수업. 


축하해, 너 시인 됐더라? 읽었어, 너다운 시를 쓰더라? 그리고 너는 이제 끄덕이겠지. 문학을 포기한 사람들에게. 이해해요, 충분히 그럴 수 있죠. 아량을 베풀겠지 이해하니까. 

있잖아, 근데 너 까먹었잖아? 네가 나랑 어떻게 헤어졌는지. 모르잖아. 모르면서 시 쓰는 거니? 


문학을 포기한 사람의 시점을 통해. 뭘 말하고 싶은 거니? 용서받을래? 도대체 뭘 용서 받고 싶다는 거야. 

위로하고 싶은거니? 네 선생님을? 재밌어? 재밌으면 지어내도 돼? 선생님, 더는 못 쓰겠어요. 더는 못하겠어요. 선생님인 척. 


뭘 뜻할 수 있는 거죠? 우리의 이별. 선생님이 아직도 과외 한다고. 누가 말해줬어요. 유명하다고. 

왜 계속 하는 거죠. 수학 과외를! 선생님 시를 쓰세요! 시를 쓰세요! 남들 시를 보는 걸로 만족한다고, 만족하신다고 그러셨지만. 믿을 수가 없었어요. 못 믿었어요. 


지진계를 좋아해서 펜을 잡았다. 펜은 지진계의 바늘이니까. 펜은 자꾸 떨고 있다. 심장을 통해. 지진계는 여진도 적어두니까. 심장아, 이제 무엇을 쓸까. 


학생의 시점으로 마무리할까? 선생의 시점으로 마무리할까? 심장아, 심장아, 너는 모르지. 네가 다음 순간에 어떻게 뛸지. 


학생은 언제까지 시인노릇을. 선생은 언제까지 수학 과외를. 지속하는가? 무너진 가슴에다 손을 얹고서. 

그러고서 당신은 비로소 쓴다. 어? 내 가슴이 무너졌구나. 


내 가슴이 무너진 거. 

너 알았냐고. 


알면서 고개만 끄덕였냐고. 






김승일 <펜은 심장의 지진계>


너의 기쁨이 되어,백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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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게 폭죽이 되고 싶었다


너의 웃음을 위해서라면

내 한 몸 다 타도 좋았다


내가 멎어도

너는 여운에 웃기를



백가희 <너의 기쁨이 되어>

눈사람 자살 사건,최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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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눈사람은 텅 빈 욕조에 누워있었다 뜨거운 물을 틀기 전에 그는 더 살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자살의 이유가 될 수는 없었으며 죽어야 할 이유가 있다는 것이 사는 이유 또한 될 수 없었다 죽어야 할 이유도 없었고 더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텅 빈 욕조에 혼자 누워 있을 때 뜨거운 물과 찬 물 중에서 어떤 물을 틀어야 하는 것일까 눈사람은 그 결과는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뜨거운 물에는 빨리 녹고 찬물에는 좀 천천히 녹겠지만 녹아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 눈사람은 온수를 틀고 자신의 몸이 점점 녹아 물이 되는 것을 지켜보다 잠이 들었다 욕조에서는 무럭무럭 김이 피어올랐다



최승호 <눈사람 자살 사건>




별 시대의 아움,이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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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익힌 불안의 자세를 복습하며 한 시절에 대해 생각한다. 그것은 이제 막 떠올랐다 사라져버린 완벽한 문장. 영원히 되찾을 수 없는 언어의 심연. 시대에 대한 그 모든 정의는 버린지 오래. 내 시대는 내가 이름을 붙이겠다. 더듬거리는 중얼거림으로 더듬거리는  중얼거림으로. 여전히 귓가엔 둥둥 북소리. 내 심장이 멀리서 뛰는 것만 같다. 세계는 무의미하거나 부조리한 것이 아니다. 그냥 있는 것이다. 그냥 있는 것. 의심을 하려거든 네 자신의 눈을 의심하고 너의 귀를 씻어라. 언제나 우린 멀리 더 멀리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었지. 극동의 쟈퐁으로 가자. 극동의 쟈퐁으로. 그러나 그대여, 누군가에겐 우리가 있는 바로 이곳이 극동이다. 일곱 계단의 정신세계. 식어버린 수요일의 요리를 먹고 얼굴을 가릴 망토도 없이 거리를 배회하던 날들. 차라리 녹아내리기를 바라던 유약한 심정으로. 시대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내가 가진 단어를 검열하는 오래된 버릇. 무한반복되는 기하학적 무늬의 영혼을 걸치고 혼자만의 아주 작은 구멍으로 빨려들어갈 듯한 노랫말을 흥얼   거리며. 어제의 기억에 단호히 마침표를 찍는 사람의 마지막 타들어가는 담배가 되고 싶다. 타닥타닥 타닥. 질 좋은 담배는 이런 식의 싸구려 발성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자신이 자신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 싸구려 발상법에 익숙하다. 구토라도 하듯 목구멍에서 말들이 쏟아져 내린다. 어머니가 울고 있다. 나비가 날고 있다. 너무 많은 바퀴 단 것들이 우루루 지나간다. 문득 비둘기 한 마리가 욕석을 퍼부으며 내 발치에 내려앉는다. 구구구 구구구. 구구단을 외우고 좀 울어도 좋을 날씨. 한 시절을 생각할  때마다 오래전 잃어버린 문장 하나가 입속에서 맴돈다. 이 거리에서 몇 번 굴러야 할지 몰라 두 번만 굴렀다. 앞으로 두 번  뒤로  두 번, 반성 자책 자기 연민 고쳐 말하기는 오래된 나의 지병. 얼룩이 남는다고 해서 실패한 건 아니다. 한 시절을 훑느라 지문이 다 닳았다. 먼지 같은 사람과 먼지 같은 시간 속에서 먼지 같은 말을 주고받고 먼지같이 지워지다 먼지같이 죽어가겠지. 나는 이 불모   의 나날이 마음에 든다. 



이제니 <별 시대의 아움>